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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칼럼[PSTP] 효도 또는 자식의 도리

황준규
2023-04-25
조회수 433

ㅇㅇ학과 진학을 꿈꾸는 학생이 있습니다.  자신의 꿈이 정확히 ㅇㅇㅇ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구체적으로 ㅇㅇㅇㅇ에 기여하는 삶을 살고 싶다 했어요.

특히, 그 분야에서  일단 ㅇㅇㅇㅇㅇ한다고 생각해서

결국 ㅇㅇ학과에 진학하자고 스스로 다짐했습니다.  

이 학생은 '이 꿈이 지금까지의 저를 있게 해줬고, 현재 수험생활의 가장 큰 원동력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학생의 가장 큰 고민은 부모님입니다.  

'엄마는 진심으로 제가 돈을 많이 벌길 바라세요.  어머니께 사실 '내가 너무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ㅇㅇ학과에 진학하고, ㅇㅇㅇ가 되면,

내가 돈을 엄마가 원하는 만큼 벌지 못할 수가 있다고, 차마 말씀드릴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 학생의 질문은 이겁니다.

'제가 자식된 도리로서, 제가 원하는 것을 어느 정도 포기하며, 부모님이 원하시는 것을 얼마만큼 맞추며 살아가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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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은 '얼마만큼'이냐고 했는데, 그건 제가 '얼마큼 맞추면 된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라 생각합니다.

아무 것도 맞추지 않아도 되고, 꽤 많이 맞추어 드려도 돼요.  거기에 정답이라는 게 있을 리 없습니다.


허나, 제가 주목하는 건, 학생이 말한 '자식의 도리'입니다.  학생은 '자식의 도리' 중 특히 효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겠지요.


효경 開宗明義章 第一에서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


효의 시작(始)에 해당하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이니, 여기서는 효의 끝(終)에 대해서 말합시다.

입신, 행도, 양명어후세, 현부모, 이것은 일종의 시간 순서가 있는 거죠.


‘입신(立身)’이란 떳떳한 인간으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이거에는 물론, 경제적 자립도 포함하는 거죠. 

길에서 노숙을 하면서 떳떳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청년실업자여도 마찬가지. 

허나, 서울대 의예과를 간다고 떳떳한 인간이 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얼마 전에 고려대 의대 가서 고작 성추행이나 하다가, 퇴학당한 학생. 

그것보다 더한 불효가 없지요.


‘행도(行道)’란 살면서 정도를 걷는 것입니다. 

그것은 끊임없는 과정의 연속이고, 끊임없는 유혹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입신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겠죠. 

흔히, 40세를 불혹이라고 하는 데, 

인간의 신체는 아무리 장수해도 물리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에, 

14세에 입지하여, 이십 오륙년을 바른 길을 걸어와, 나이 사십 쯤 되면 그게 얼굴에 드러나요. 

그 경지를 불혹(不惑)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揚名’, 이것이 가장 오해되는 것입니다. 

양명이라는 게 무슨 celebrity가 되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입신과 행도가 있으면 결국, 양명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아니라구요? 어후세(於後世)! 후세잖아요. 현세가 아니구요. 

비록, 현세에는 아니더라도, 후세에는 결국 이름을 떨치게 됩니다.

 이것은 역사성에 대한 깊은 신뢰가 없으면 할 수 없는 말입니다.


그렇게 이름을 떨치게 되면, 사람들은 ‘대체 그의 부모는 어떻게 교육했길래 그런 위대한 사람이 나왔는가?’라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그게, ‘현부모(顯父母)’입니다. ‘현부모’보다 더한 효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현부모가 효의 끝이라고 공자는 말했습니다.


자, 보세요. 효의 어디에 ‘돈을 많이 버는 게’ 있나요? 없죠. 

그러니까, 돈으로 효도한다는 생각은 적어도, 인류의 보편성으로서의 효는 아닌 겁니다. 

잊지 마세요. 부모와의 관계도 인간관계의 보편성을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부모와의 관계는 인간관계의 시작이므로, 가장 보편적이어야 합니다.

 어른이 된다는 건, 부모와의 관계에서 자신의 인생을 찾아 독립하는 것, 특히 자신의 꿈에 책임을 지는 것도 포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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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께서는 분명히, '너가 정도를 걸은 것이 후세에 이름을 떨치어 사람들이 너의 인격에 감탄한 나머지, 너의 부모를 우러르게 되면 그것이 효의 끝이라'고 하였는데도

사람들은 현세에 부모에게 돈을 가져다 바치고, 부모에게 사치품 가져다 바치는 걸 자랑하고, 부모가 자식에게 요구합니다.


뭐, 그런 왜곡이 어디 공자뿐인가요.

 예수께서는 분명히 '남 앞에서 기도하지 말고, 다락방에서 문을 닫고 아무도 들리지 않게 기도하라'고 하셨는데도

사람들은 큰 건물을 짓고, 화려한 조명과 정교한 음악 속에서 뽐내듯이 큰 소리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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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태어난 우리 모두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 없습니다.

재수학원에서 수험생을 가르치다보면

수험생들의 고통 속에 그 수험생의 부모가 존재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아버지 같은 남자를 만날까봐, 그냥 혼자 살거라고 눈물을 흘리는 여학생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아버지와 이혼 후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이 추악하게 느껴진다는 학생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어릴 때 한 폭언이 지금 공부 할 때마다 머리를 맴돈다는 학생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바람이나 피는 주제에 내 공부가 형편 없다고 면박을 주면 분노에 사로 잡힌다는 남학생을 본 적이 있습니다.


고작 이제 만으로 열 여덟, 열 아홉인 학생들이 말이지요.

이건 그리 간단하게 '야 힘내'라고 쿨하게 웃어 넘길 일이 아니에요.  

굳이 Freud까지 읽지 않아도, 우리는 어릴 때의 트라우마가 사람을 어떻게 힘들게 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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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을 하고 싶습니다.

첫째, 학생이 수험생이면 스무살이 넘었거나, 곧 스무살이 넘을 겁니다.  

법적으로 성인이라고요.

성인인 당신은 더 이상 청소년이 아니므로, 스스로의 인생을 살 권리와 책임이 있습니다.

당신 인생은 당신의 것이며, 그래야만 한다고요.

그러니,  어느 곳을 찾아 그 곳에 우뚝 설 건가

그러기 위해 무엇을 노력할 거며, 무엇에 집착할 거며, 반면 무엇을 버리고 희생할 것인지를 정하세요.


둘째, 효도라는 왜곡된 관념에 얽매이지 마세요.

앞에서 말한 것처럼, 공자는 살아 생전에 부모에게 돈이나 명예를 가져다드리자고 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저 욕망일 뿐.  

그런 욕망이 그 자체로 죄악이 되는 건 아니고, 뭐 부모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이상할 건 없지만요.

그게 '자식의 도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셋째, 부모가 잘못한 것을 자신의 잘못으로 여기지 마세요.

부모의 잘못은 부모의 잘못이며,

꽤 많은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심각한 잘못을 저지릅니다.

어린 자녀들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앞서 말했지만, 우리는 부모를 선택해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넷째, 부모의 잘못에서 자신의 인생이 벗어나지 못하게 될 까 두려워하지 마세요.

부모가 인생을 잘못 살 때, 그것에서 자식의 인생이 쳇바퀴처럼 그 잘못을 반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불교에서 업보(karma)라고 하지요.

법륜 스님께서는 부모의 학대의 업보를 벗어나고 싶다고 한 상담자에게, 

 '부모님 감사합니다'고 매일 108배를 올리라고 했습니다.

이건, 부모의 학대를 인정하라는 게 아닙니다.

흔히, '욕하면서 닮는다'고 하지요.

알콜 중독에 폭력 성향의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들이

다시 알콜 중독에 폭력을 자신의 아들에게 휘두르는 건 흔한 일입니다.


예를 들어, 나에게 언어 폭력을 그것도 씻겨지지 않는 트라우마를 남긴 부모가 있다 해도,

그 분이 적어도 경제적으로는 나를 배부르고 등따뜻하게 해주었다고 하면

그렇게 먹이고 입혀줘서 감사합니다 하고 절을 108번이나 하라는 거지요.


폭력을 휘두른 것도 모자라, 경제적으로도 방치하고 심지어 학대받았던 사람에게도

불교에서는 '아 그래도 당신 때문에 내가 세상에 태어났으니 감사합니다'라고 절에가서 불상 놓고 108배 하라고 해요.


이건, 효도를 강요하는 게 아닙니다.  

학대받은 자가 학대한 자를 용서하라는 또 다른 억압이 아니에요. 

고통이 남긴 트라우마 속에 가려져 있는 진실을 들추어내

우리를 치료하는 지혜에요.


왜냐면 우리는 공감할 때만이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할 때만이 고통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 학대받아 남성성을 경멸하게 된 여학생이 있을 때,

그 여학생이 그것 때문에 평생 혼자 살 건,

아니면 억지로라도 남자를 만나서 가정을 꾸리건

어느쪽도 강요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정답이 없어요.


허나, 이건 분명합니다.

만약 그 여학생이 어른이 되고,

육체적으로 매력있는 여성으로 자라났을 때,

아버지에게 학대받았던 트라우마를 이기지 않으면

남성을 이유없이 경멸하면서 인간과 사회의 절반을 잃어버리던가

아니면, 다시 자신의 아버지 못지 않게 자신을 학대할 나쁜 남자에게 끌린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아빠가 이러이러한 학대를 했었지만

그래도 저러저러할 때는 좋았어.  그건 고마웠어'

라고 생각하라는 불교적인 전통이 결국 현대의 정신심리학과도 닿아있음을 알게 됩니다.


좋은 부모를 만나지 못했던 사람도

좋은 어른이 될 권리가 있고

자신이 좋은 부모가 될 권리도 있습니다.  


결국 Goethe의 말대로

'우리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권리가 있다'는 걸 잊지 마세요.


예수의 다음 말이 지금까지 내려옵니다.

'For what goes into your mouth will not defile you ;

 rather, it is what out of your mouth that will defile you.'

 '너희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너희를 더럽힐 수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너희를 더럽히는 것은 너희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라.' (Thomas 4)


어릴 때 폭언과 학대를 겪었던 학생이 있다면

당신은 어느 누구보다도 당신의 언어를 더 아름답게 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선택하지 못할 학대를 겪었지만, 당신의 언어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쌓일수록 당신은 그것을 이겨내는 훌륭한 인격이 되는 것입니다.  


1942년 북아프리카에 연합군이 상륙할 때, 

알제리에 남은 A.Camus는 그의 그리운 가정과 가족들과 단절되어 

다음과 같이 씁니다.  이걸 당신에게 적으며 이 글을 끝내고 싶습니다.



'알제리아에서는, 밤에 개 짖는 소리가 유럽의 밤보다도 10배나 더 메아리로 울려 들린다. 

이처럼 그것은 이 비좁은 나라에서는 알 수 없는 鄕愁로 장식되어 있다. 

그것은 오늘날 내가 나의 추억 속에서 홀로 듣고 있는 언어다. 

겨울, 이 완전한 자연과 하얀 평화. 괴로운 사랑에 시달리고 있는 이 心臟을 쓰다듬어 준다.


하늘은 푸르고 강가에서 얼어붙은 물 위에 하얀 가지를

내려뜨리고 뻗혀 있는

눈에 덮인 나무들은

꽃이 핀 편도나무 냄새를 풍기고 있다


봄과 겨울이 끊임없이 뒤섞인

이 부조리의 세계에서 사랑을 다시 살리리라

인간 감정 중 가장 뜨거웁고 가장 멸망하기 쉬운 것

그것을 다시 살리리라


‘우리들이 만약에 神이라면 우리들은 사랑을 알지 못할 것’이라 플라톤은 했다지

허나, 이 지상에는

참지 못할 사랑을 참으라는 그 따위 가치판단은 없다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

가능한한 가장 위대한 한계까지 유지시키는 방법

영원보다 밖에 있는 사랑

구속과 恍惚

두 가지를 다 포함한 모든 말이 주는 감정

그 중에 가장 인간적인 것


인간은 오로지 사랑 속에서 그 자신을 인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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