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신이 망했는데 의대는 가고 싶다며
이런저러한 인강 공부법이나 팁을 물어보는 학생들이 게시판에 종종 보입니다.
질문하라고 있는 게시판이니까 질문하는 게 부당할 리 없지만, 거기에 합당한 답글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거겠지요.
일반고에서 내신 5등급 받았는데 정시로 의대 합격한 학생이 있으면
벌써 입시계에서 전설이 되어 있겠지요.
검색창에서 몇 번 검색해도 그 학생의 사례가 뜰 것입니다.
내신과 수능은 애초에 시험의 목표, 시험이 평가하고자 하는 가치부터 다른 데 대체 왜 그럴까요?
여러분이 내신등급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땄는지
혹은 어떻게 망쳤는지를 돌아보면 되요.
아무리 내신이 지엽말단을 물어보고
수능은 의미있는 사고력을 물어본다고 해도
내신을 잘 따는 것은
그 학생이 똑똑하고, 자기규율이 엄격하고, 멈추지 않고 오랜 시간 아주 어릴 때부터 학습에 매달렸으며,
그 외의 모든 즐거운 것들을 secondary로 취급했기 때문입니다.
수시로 의대 가건 정시로 의대 가건
숱한 의대생들을 보아왔지만
위의 밑줄 친 미덕은 동일합니다.
그러니까 이 글의 제목인 어느 학생들의 질문을 보세요.
'내신이 망했는데 의대는 가고 싶다'
(이 칼럼은 물론 저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지
메디친의 공식 견해와는 무관합니다만)
저는 메디친이 저런 사이코패스에 가까운 질문에
'응 괜찮아 너도 할 수 있어. 호호 꽃길만 걷자'
이런 거짓말을 하는 곳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사이코패스라는 말이 심하다고요?
내신이 망했다에는 주어가 없잖아요. 내신이 망한 것은 내신 책임입니까?
의대는 가고 싶다에는 주어가 있잖아요. 당신이 의대는 가고 싶은 거지요.
당신의 말 속에는 당신의 둔함, 자기규율 없이 느슨함, 공부를 제대로 한 어린 시절도 없이 공부하겠다 맘 먹은지 몇 개월 되지도 않으며,
의미 있는 미덕이지만 공부의 성취와는 거리가 있는 것들을 구별 하지 않는 우유부단함에서 온 내신등급에서의 성취의 실패는
마치 자신의 책임이 아닌 것처럼 뒷전으로 하고,
의대 가고 싶은 자신의 ego는 아주 생생하게 생동하고 있지요.
인간의 성숙도는 자신의 말과 생각과 행동에 얼마나 책임을 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내신은 긴 시간 동안 땁니다.
하루하루의 학교에서의 학습에 무엇이 있었는지
나의 둔함을 어떻게 채워나갈지
나의 규율을 어떻게 세워나갈지
내가 어린 시절 적게 공부한 것을 어떻게 메워나갈지
무엇보다도 내가 공부 외에 다른 것을 희생할만큼의 각오는 되어 있는지
내신이 나빴던 학생들이
정시로 수능에 올인한다고 할 때
그 학생의 발목을 잡는 것은
결국 내신 때와 같은 것입니다.
그건 학생 자신이에요.
그래서, Goethe가 '인간은 타인에게 속지 않는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속는다'고 한 겁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책임감이 있는 학교 교사라면
내신이 나쁜 고1 2학기에서 고2 2학기의 학생들이
'내신은 망했으니 정시에 집중할래요'
라고 할 때
'그래도 남은 내신과 학교생활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며
말리게 되는 이유입니다.
그걸 학생이 꼰대 취급한다면 미안하지만 학생 당신은 답이 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 거에요.
틴에이져에게 부모 말고 책임감을 느낄 사람은 학교 교사 말고는
종교 지도자 외에는 없을테니까요.
동네 학원이나 인강 사이트에 질문해 보았자
학원과 인강의 고객으로서 응대할 것이 분명하지요.
커피 마시러 온 사람에게
커피는 몸에 나쁘다고 말할 카페 직원은 없습니다.
내신이 망한 이유를 극복해서 다시 내신을 좋게 딸 정도가 되지 않는한
당신은 정시를 잘 하기 어려워요.
사실 정시에 6개월 이상 집중하기도 어렵습니다.
이게 우리 책임 있는 어른들이 말해주어야 할 진실입니다.
이 조언을 아무리 그 학생이 싫어해도요.
내신 문항이 저열해 보일 때가 있다 하더라도
학교 수업이 느슨해 보일 때가 많다 하더라도
사고력이란 그 다양한 활동 속에서
예기치 않은 방향에서의 연결을 겪으며
직조(織組)됩니다.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내신을 실패하고 정시에 올인 한다면서
몇 시간만 잔다던지
하루 순공 몇 시간 찍을 거라든지
무슨 슈퍼맨 같은 초월적인 노력을 하는 것에 관심을 두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내신의 좋은 등급이건 수능의 좋은 등급이건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한데
문제는 초월적인 노력은 항상 지속적인 노력에 진다는 것입니다.
지속성은 초월성보다 위대한 것입니다.
....................................................
나는 내신을 못 딴 당신을 혐오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당신을 사랑하면서 당신을 도우라는 겁니다.
누군가를 혐오하면서 그를 도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일반고 내신 4등급, 5등급인 당신은
자신의 상황을 스스로 도우면서 시작해야 해요.
누군가를 도와보았어요?
봉사시간 따려고 몸대주고 있는 거 말고요.
누군가를 도우려면 그 사람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일정기간 지켜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돕기 시작한다면 적어도 그 도움이 주는 영향 내에서만큼은
혹은 그와 관련된 약간 넓은 범위에서도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책임감을 가진다는 것은 일관성을 확보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심리학자 Jordan Peterson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 전 그런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Treat yourself like someone you are responsible for helping.'
그러면서 다음 T.S.Eliot의 시를 인용한 것도요.
그걸 재인용하면서 이 글을 마치겠습니다.
당신을 외면하면서 당신이 발전할 수는 없습니다.
당신이 비참하게 실패한 지점을 직면하지 않으면 당신은 그 실패로 다시 되돌아오기 마련이거든요.
"We shall not cease from exploration
And the end of all our exploring
Will be to arrive where we started
And know the place for the first time
Through the unknown, remembered gate
When the last of earth left to discover
Is that which was the beginning;
At the source of the longest river
The voice of the hidden waterfall
And the children in the apple-tree
Not known, because not looked for
But heard, half-heard, in the stillness
Between two waves of the sea.
Quick now, here, now, always -
A condition of complete simplicity
(Costing not less than everything)
And all shall be well and
All manner of things shall be well
When the tongues of flames are in-folded
Into the crowned knot of fire
And the fire and the rose are one."
("Litte Gidding" Four Quartets, 1943)
내신이 망했는데 의대는 가고 싶다며
이런저러한 인강 공부법이나 팁을 물어보는 학생들이 게시판에 종종 보입니다.
질문하라고 있는 게시판이니까 질문하는 게 부당할 리 없지만, 거기에 합당한 답글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거겠지요.
일반고에서 내신 5등급 받았는데 정시로 의대 합격한 학생이 있으면
벌써 입시계에서 전설이 되어 있겠지요.
검색창에서 몇 번 검색해도 그 학생의 사례가 뜰 것입니다.
내신과 수능은 애초에 시험의 목표, 시험이 평가하고자 하는 가치부터 다른 데 대체 왜 그럴까요?
여러분이 내신등급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땄는지
혹은 어떻게 망쳤는지를 돌아보면 되요.
아무리 내신이 지엽말단을 물어보고
수능은 의미있는 사고력을 물어본다고 해도
내신을 잘 따는 것은
그 학생이 똑똑하고, 자기규율이 엄격하고, 멈추지 않고 오랜 시간 아주 어릴 때부터 학습에 매달렸으며,
그 외의 모든 즐거운 것들을 secondary로 취급했기 때문입니다.
수시로 의대 가건 정시로 의대 가건
숱한 의대생들을 보아왔지만
위의 밑줄 친 미덕은 동일합니다.
그러니까 이 글의 제목인 어느 학생들의 질문을 보세요.
'내신이 망했는데 의대는 가고 싶다'
(이 칼럼은 물론 저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지
메디친의 공식 견해와는 무관합니다만)
저는 메디친이 저런 사이코패스에 가까운 질문에
'응 괜찮아 너도 할 수 있어. 호호 꽃길만 걷자'
이런 거짓말을 하는 곳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사이코패스라는 말이 심하다고요?
내신이 망했다에는 주어가 없잖아요. 내신이 망한 것은 내신 책임입니까?
의대는 가고 싶다에는 주어가 있잖아요. 당신이 의대는 가고 싶은 거지요.
당신의 말 속에는 당신의 둔함, 자기규율 없이 느슨함, 공부를 제대로 한 어린 시절도 없이 공부하겠다 맘 먹은지 몇 개월 되지도 않으며,
의미 있는 미덕이지만 공부의 성취와는 거리가 있는 것들을 구별 하지 않는 우유부단함에서 온 내신등급에서의 성취의 실패는
마치 자신의 책임이 아닌 것처럼 뒷전으로 하고,
의대 가고 싶은 자신의 ego는 아주 생생하게 생동하고 있지요.
인간의 성숙도는 자신의 말과 생각과 행동에 얼마나 책임을 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내신은 긴 시간 동안 땁니다.
하루하루의 학교에서의 학습에 무엇이 있었는지
나의 둔함을 어떻게 채워나갈지
나의 규율을 어떻게 세워나갈지
내가 어린 시절 적게 공부한 것을 어떻게 메워나갈지
무엇보다도 내가 공부 외에 다른 것을 희생할만큼의 각오는 되어 있는지
내신이 나빴던 학생들이
정시로 수능에 올인한다고 할 때
그 학생의 발목을 잡는 것은
결국 내신 때와 같은 것입니다.
그건 학생 자신이에요.
그래서, Goethe가 '인간은 타인에게 속지 않는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속는다'고 한 겁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책임감이 있는 학교 교사라면
내신이 나쁜 고1 2학기에서 고2 2학기의 학생들이
'내신은 망했으니 정시에 집중할래요'
라고 할 때
'그래도 남은 내신과 학교생활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며
말리게 되는 이유입니다.
그걸 학생이 꼰대 취급한다면 미안하지만 학생 당신은 답이 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 거에요.
틴에이져에게 부모 말고 책임감을 느낄 사람은 학교 교사 말고는
종교 지도자 외에는 없을테니까요.
동네 학원이나 인강 사이트에 질문해 보았자
학원과 인강의 고객으로서 응대할 것이 분명하지요.
커피 마시러 온 사람에게
커피는 몸에 나쁘다고 말할 카페 직원은 없습니다.
내신이 망한 이유를 극복해서 다시 내신을 좋게 딸 정도가 되지 않는한
당신은 정시를 잘 하기 어려워요.
사실 정시에 6개월 이상 집중하기도 어렵습니다.
이게 우리 책임 있는 어른들이 말해주어야 할 진실입니다.
이 조언을 아무리 그 학생이 싫어해도요.
내신 문항이 저열해 보일 때가 있다 하더라도
학교 수업이 느슨해 보일 때가 많다 하더라도
사고력이란 그 다양한 활동 속에서
예기치 않은 방향에서의 연결을 겪으며
직조(織組)됩니다.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내신을 실패하고 정시에 올인 한다면서
몇 시간만 잔다던지
하루 순공 몇 시간 찍을 거라든지
무슨 슈퍼맨 같은 초월적인 노력을 하는 것에 관심을 두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내신의 좋은 등급이건 수능의 좋은 등급이건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한데
문제는 초월적인 노력은 항상 지속적인 노력에 진다는 것입니다.
지속성은 초월성보다 위대한 것입니다.
....................................................
나는 내신을 못 딴 당신을 혐오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당신을 사랑하면서 당신을 도우라는 겁니다.
누군가를 혐오하면서 그를 도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일반고 내신 4등급, 5등급인 당신은
자신의 상황을 스스로 도우면서 시작해야 해요.
누군가를 도와보았어요?
봉사시간 따려고 몸대주고 있는 거 말고요.
누군가를 도우려면 그 사람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일정기간 지켜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돕기 시작한다면 적어도 그 도움이 주는 영향 내에서만큼은
혹은 그와 관련된 약간 넓은 범위에서도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책임감을 가진다는 것은 일관성을 확보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심리학자 Jordan Peterson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 전 그런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Treat yourself like someone you are responsible for helping.'
그러면서 다음 T.S.Eliot의 시를 인용한 것도요.
그걸 재인용하면서 이 글을 마치겠습니다.
당신을 외면하면서 당신이 발전할 수는 없습니다.
당신이 비참하게 실패한 지점을 직면하지 않으면 당신은 그 실패로 다시 되돌아오기 마련이거든요.
"We shall not cease from exploration
And the end of all our exploring
Will be to arrive where we started
And know the place for the first time
Through the unknown, remembered gate
When the last of earth left to discover
Is that which was the beginning;
At the source of the longest river
The voice of the hidden waterfall
And the children in the apple-tree
Not known, because not looked for
But heard, half-heard, in the stillness
Between two waves of the sea.
Quick now, here, now, always -
A condition of complete simplicity
(Costing not less than everything)
And all shall be well and
All manner of things shall be well
When the tongues of flames are in-folded
Into the crowned knot of fire
And the fire and the rose are one."
("Litte Gidding" Four Quartets, 1943)